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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리P홀) 카르마에 대해서 2

일어나 2021. 9. 24. 14:21

 

Q. 저는 카르마의 교리가 상식적으로 맞는 것 같아서 믿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교리가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공존할 수 있습니까?

 

저는 카르마의 법칙이 윤리와 도덕의 근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사실임을 얼마든지 입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카르마의 작용을 둘러싼 오해가 많습니다. 특히 서양 사람들이 이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악덕과 이에 따른 응징의 반복이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카르마의 작용은 영구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이 진리를 기반으로 행동하며 살기 시작하면 카르마의 부정적인 측면이 점차 사라집니다.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그때마다 벌을 받는 순환이 영원토록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대부분 인간은 세상에 태어날 때마다 전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떠납니다.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받게 된다는 교훈을 얻으면서 존재의 의미에 대한 이해도 깊어집니다. 성장이라는 것은 한마디로잘못을 교정하고 공덕을 확장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카르마의 법칙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수차례의 환생을 통해 삶을 체험하고 배우면서 궁극적으로는 인격을 개조하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인간이 물질적 삶을 체험하면서 전보다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지 않는다면 내면의 신성을 펼치는 진화의 프로그램도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무지에 대한 형벌이 없다면 사는 것에도 의미가 없습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5 48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지금 세상에 사는 사람 중 이번 생에서온전한경지에 이를 예정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격상의 결점을 극복하는 것도 가까운 시일 안에 이루어질 수 없고, 특히 무신론자들은 삶에 대한 비관적인 관점을 끝내 버리지 못한 채 이번 생을 마감할 가능성이 큽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며칠 만에 기적적으로 성인이 될 수 없듯이, 인간이 온전해지는 것도 장기적인 프로젝트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성장하고, 여러 개의 한 걸음이 모여 천릿길을 걸은 후에 우리의 진짜 고향인 영원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카르마는 공정하고 우리 삶에서 꼭 필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입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우리 주변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진화의 프로그램이 매 순간 실행되고 있다는 근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실수를 저지르고 나서도 본능적으로 그 일에 내포된 철학적 의미에 대해 사색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주도합니다. 실수를 인정한 후에는 바로잡고, 미덕은 더욱 강화하고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올바른 행동에 따른 즉각적인 보상은 다름 아닌 마음의 평온이며, 장기적으로는 망상에서 해방되는 혜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장은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입니다. 성장의 속도를 늦출 수는 있지만 중단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계발에 저항하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뒤따릅니다. 성경에서는 십계명을 통해 이 단순한 진리를 전달하고 있고, 힌두교, 불교, 유교에도 이에 해당하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인간에게 필요하고 적합한 법이 항상 존재했습니다. 다만 그 법을 부정하고 무시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뉘우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말로 하는 뉘우침이 아니라,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속죄하는 진정한 뉘우침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카르마가 사라집니다. 죄를 지은 후 나 자신을 벌하고, 필요한 교훈을 얻고, 그 교훈을 통해 전보다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면 추가적인 형벌이 부과되지 않습니다. 적을 용서하지 않으면 나도 천국의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삶이 주는 교훈을 거부하고 치명적인 삶의 방식을 고집하면 천국도 나를 외면하고, 스스로 정신을 차릴 때까지 고통이 주어집니다.

 

행복, , 명예, 물질적 쾌락을 성취하는 데 정신이 팔려 사려 깊음과 헌신을 통해서만 속죄 가능한 카르마를 계속 만들어냅니다. 이 진리는 영원토록 자명합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진 존재의 삶은 유한하며, 이곳에 머무르면서 열심히 키운 나쁜 습관들은 무덤 너머의 세상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 세상에 태어날 때 가져오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쌓은 공덕과 신이 선사한 잠재력뿐이고, 떠날 때 가져가는 것은 매일을 살고 경험하며 이룬 성장, 그게 전부입니다. 살면서 이 냉엄한 진리를 망각할 수는 있지만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지만, 우리부터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무시했거나 거부한 가치를 되찾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합니다. 하늘에 대고 기도하면서 계속 하늘의 법칙을 위반하면 불행이 사라질 수 없습니다.

 

우리 개개인이 해야 할 일은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한 후,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뉘우치고, 바로잡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다녀간 여러 명의 위대한 스승들이 평온함에 이르는 길은 이미 명확하게 제시해 놨습니다. 깨달은 삶의 실천으로 내 안의 신성이 해방되고, 그 신성이 복합적인 요소들로 구성된 하나의 세상이나 다름없는 인격체의 군주가 되어 나를 다스려야 합니다. 내 안의 신성은 내 인격과 성격을 구성하는 모든 하위 속성을 지배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적을 용서해야 신도 나를 용서합니다. 나를 괴롭히고 있는 약점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내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고 진실성을 입증해야 합니다. 무지에서 비롯된 고통을 받는 인간은 어린이와 여러모로 비슷합니다. 우리는 아이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그에게 영원한 형벌을 선고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행동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올바른 지침을 제시하며 계속 지도합니다. 오늘날 인간은 대체로 온전하지 않으며, 조만간 온전해질 가능성도 별로 없습니다. 내가 지금 뭘 어떻게 잘못하고 있는지 모르면 내가 왜 고통스러운지도 알 수 없습니다.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오래된 습관을 끊어버리는 일에는 큰 고통이 뒤따릅니다. 술을 끊겠다고 맹세한 알코올 중독자는 이 말의 의미를 잘 알 것입니다. 직장생활의 기반을 통째로 흔들고 부와 명예의 포기를 요구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기주의자는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고 비행을 일삼는 사람에게는 철퇴를 가하고, 속세의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환멸을 가져다 주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게 바로 카르마의 빚을 갚는 방식입니다.

 

세상에는 천성적으로 제 앞가림을 잘하며 성장하는 아이도 있고, 지속적인 훈육과 지도를 통해서만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아이도 있습니다.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지만, 서툰 솜씨에 대한 보상은 없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강력한 압박을 체험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평온을 얻고, 무시하는 사람은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형벌을 받습니다.

 

초기 기독교 신앙과 스승들의 가르침에는 대리 속죄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습니다. 신앙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행동을 지속하면서 영원한 자비에 의해 구원될 것이라는 기대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나의 잘못을 바로 잡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지는 어떤 동기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진정한 속죄 없이는 구원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인과관계 법칙의 또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잘못을 깨닫고, 속죄하고, 종교적인 삶을 실천했을 때 비로소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대다수 어린이는 우리가 잘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시기를 통과합니다. 이 시절의 아이들은 이런 얘기를 종종 합니다. “1주일 동안 착하게 지냈는데 그때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작은 실수 하나 저질렀더니 엄마한테 크게 혼났어.” 많은 사람이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번 생이든 아니면 전생이든, 잘못한 것 가지고 벌을 받는 것은 불공정하고 비합리적이라고 항변합니다. 하지만 카르마는 형벌의 동의어가 아닙니다. 악을 행하면 필연적으로 형벌이 뒤따르고, 선을 행하면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불변의 법칙입니다. 우리에게 생기는 좋은 일들은 모두 우리가 과거의 선행으로 만들어낸 원인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나에게 생긴 좋은 일, 좋은 특권을 남용하면 새로운 카르마가 생성됩니다.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는 것도 오로지 인과관계의 법칙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주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법칙과 조화를 이루며 행동했을 때 깨달음이라는 결과가 필연적으로 탄생하는 것입니다. 부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행을 중단하고, 선행을 쌓고, 마음을 정화하라.” 어떤 종교도 이 가르침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경쟁은 자기 파괴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생존하지 못합니다. 분쟁도 같은 이유로 영원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행동은 카르마에 의해 계속 이에 상응하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지므로 영속될 수 없습니다. 진리만이 불멸의 속성을 지녔고, 궁극적으로 선이 악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카르마의 진짜 가르침입니다. 바람을 심으면 회오리바람을 수확하게 되어있습니다. 선택은 언제나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천국은 우리에게 미덕을 강요할 수 없지만, 우리가 미덕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실천하면 크게 기뻐합니다. 성장에 저항할수록 슬픔과 성장통도 커집니다. 내 문제는 내가 만들어낸 것이므로 해결도 내가 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한 것은 카르마의 관점에서 봤을 때 아주 정확한 표현입니다. 내가 어떤 식으로든 남에게 피해를 보았다면 모든 종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무시하고 복수를 시도하는 잘못된 선택을 내리거나,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에 따르는 대가를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해서 저지른 짓이라고 판단하는 올바른 선택을 내릴 수 있습니다. 복수는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카르마가 완벽하게 채무 관계를 정산합니다. 카르마의 법칙에 따르면 내가 용서하면 나도 용서를 받습니다. 내가 상처를 입었다고 해서 세상에 더 많은 상처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면 분노를 초월하고 진실성에서 안식처를 찾아야 합니다. 내가 용서받기 원한다면 타인의 무지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카르마에 대한 믿음과 확신은 극단적인 행동을 자제하도록 작용하며, 동기를 정화하고 운명을 실현할 수 있도록 우리를 단련시킵니다.

 

출처

천사가 된 악마, 맨리 P. , 마름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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